술렘 여인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하자마자 주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고통을 받았습니다. 거듭난 성도들이 주님과 성령 안에서 교제하는 중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될 때에 주님께서는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떠나시게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 때에 타락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 가운데 주님께서 얼마나 예민하신 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마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그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으며 그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계 3:19-20)
주님과 교제가 끊어진 라오디게아 교회가 육신적으로 된 것에 대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며, 부요하고,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게 되어 주님을 문 밖으로 쫓아내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사탄 마귀는 육신적인 달콤한 말로 성도들을 속여서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함으로 인해 육신적인 삶을 살게 하여 어두움 가운데 헤매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나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화평이니라.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로 할 수도 없음이라. 그러므로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6-8)
술렘 여인이 솔로몬과 교제가 끊어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며 자기 중심적인 삶이 될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술렘 여인의 말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니 그가 백합꽃들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도다. “(솔 2:16)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의 일 보다 자신의 일만을 도모하는 성도들에게 책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 예수 안에서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바라노니, 이는 너희 형편을 알고 위로를 받으려 함이라. 이는 나에게는 생각을 같이하여 너희의 형편을 진심으로 염려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 모두 자신의 일만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구하지 아니하느니라.”(빌 19-21)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라 말하는 솔로몬의 음성을 들었던 술렘 여인은 자신의 일만을 먼저 생각함으로 인해 그와 함께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면서 말했습니다: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사라지면 돌아오소서.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은 벧엘(Bether) 산 위의 노루나 어린 사슴 같나이다.”(솔 2:17)
술렘 여인이 머뭇거리며 말했을 때 솔로몬 왕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가운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며 아직 때가 아니라고 변명할 때에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밤에 내 침상에서 내 혼이 사랑하는 이를 찾았도다. 내가 그를 찾았으나 그를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솔 3;1)
술렘 여인은 자신의 생각을 동원하여 그를 넓은 길로 다니며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넓은 문이나 넓은 길에는 계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the strait gate)으로 들어가라. 이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광대하여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으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협소하여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음(few)이니라….좁은 문(the strait gate)으로 들어가려고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7:13-14, 눅 13:24)
좁은 문(the strait gate)의 뜻은 사도 바울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어떤 약함이나, 모욕이나, 궁핍이나, 박해나, 곤경이나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문이며 길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술렘 여인은 성읍을 순찰하는 파수꾼을 만나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보았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파수꾼은 오늘날 교회 목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파수꾼 역시 옛날 이스라엘의 목자들이나 오늘날 대부분의 목자들처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 목자들이 얼마나 육신적인 삶을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너희 모든 들 짐승들아, 삼림 가운데 있는 너희 모든 짐승들아, 와서 먹어치우라. 그의 파수꾼들은 눈멀었고, 그들은 모두 무지하며, 그들은 모두 말 못하는 개들이니 그들이 짖지 못하는 개들이니 그들이 짖지를 못하며 잠자고 눕고 졸기를 좋아하느니라. 정녕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많은 개들이며, 깨닫지 못하는 목자들이라. 그들 모두가 그들 자신의 길만을 보나니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의 이익만 도모하고, 말하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니 우리가 독주를 진탕 마시자. 내일도 오늘 같을 것이요, 더 많이 풍요하리로다.’ 하느니라.”(사 56:9-12)
마침내 술렘 여인은 천신만고 끝에 사랑하는 이를 만나게 됩니다. 한 번 주님과 교제가 끊어지게 되면 엄청난 회개와 금식과 같은 고난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 만났을 때 한 말 속에 절실한 고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를 붙들고 내 어머니의 집, 나를 잉태한 어머니의 방으로 그를 데려올 때까지 그를 놓지 아니하였도다.”(솔 3:4)
성경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우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갈 4:26)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후 엄청난 고통 속에서 마침내 사랑하는 이를 찾은 술렘 여인은 그분과 함께 새 예루살렘에 이르는 그 날까지 주님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던 어떤 그리스도인이 술렘 여인처럼 주님께 기도하는 찬송시를 만들었습니다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어둠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마침내 술렘 여인은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다시 한 번 부탁하면서 자신과 사랑하는 이와의 교제를 방해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교제할 줄 모르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을 알지 못하고 질투하고 놀리는 언사들을 많이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노루들과 들의 암사슴들로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그가 원하기 까지는 내 사랑을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라.”(솔 3:5)
주님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우다 큰 곤욕을 치렀던 술렘 여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요, 나의 사랑하는 이는 내 것이라….나는 나의 사랑하는 이의 것이며, 그의 사모함은 나를 향해 있도다.”(솔 6:3;7:10)
주님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은 술렘 여인처럼 언제든지 하늘 문을 여시고 “이리 올라 오라!”는 나팔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응답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