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개 선지자는 70년간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고 남은 자들에게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 당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보려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읽어보면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에서 나온 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우리 한국이 당한 일제 36년의 두 배를 종살이 한 겁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은 영육간에 피폐해진 그들에게 학개와 스가랴와 말라기를 통해서 “책망하는 말씀, 소망의 말씀, 인도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은 학개서를 통해 주신 그 말씀들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학개 1장 1, 2절에 “다리오 왕 제 이 년 여섯째 달 일 일 주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를 통하여 스알티엘의 아들 유다의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임하여 말씀하시니라. 만군의 주가 이같이 일러 말하노라 이 백성이 말하기를 주의 집을 건축해야 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씀했습니다.
이제 성전을 지어야 하겠다고 한 거지요. 왜 이 말씀이 임했을까요? 그들이 돌아와서 보니까 성전이 불타고 예루살렘이 다 불타 버렸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네 집 짓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러다가 주의 집,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었다며 성전을 짓기는 했는데 너무 성의가 없었습니다.
이 성전 건축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는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희생제를 드려 죄들을 용서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정말 건물 그 자체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습니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건물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건물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헤롯이 지은 것은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은 에서의 자손으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백성을 다스릴 유화책으로 이전의 성전을 본 따 적당히 지어놓은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허물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하셨지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46년 동안 지어 완성한 건물을 어떻게 사흘 만에 일으키겠느냐?”고 했습니다. 주님의 몸이, 성령 받은 자들의 몸이 성전인 것을 알 리가 없지요. 실제로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거기에 ‘그룹의 영광’도, ‘하나님의 영광’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는 주님 안에만 성령이 임했기 때문에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곳이 성전이었듯이 “주님만이 하늘과 땅의 성전”이었습니다. “너희가 성전을 허물라.”는 그 말씀의 뜻은 “너희가 나를 죽여봐라. 내가 셋째 날에 살아날 것이다.” 였는데, 그걸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은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이스라엘에도 성전이 없습니다. 파괴된 성전의 자리에는 ‘이슬람 모스크’가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서 성전 건축을 한다고 건축 헌금을 거두고 멋지게 꾸민다고 하는데,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성전입니까? 예수님이 올라가시고 성령을 보내셨는데 그의 영을 받은 사람이 성전인 것입니다. 수천억 원을 들여서 성전이라고 건축해 놓지만, 사실 자기의 성전이 무너진 것을 모릅니다. 건물은 있어도, 참 의미의 성전은 없어진 것을 모릅니다. 오늘 날 ‘성전’이 어디에 있습니까?
니케아 종교회의 이후 캐톨릭이 바벨론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 대부분 모든 교회에 다 들어와 있습니다. 진짜 성전인 성도들의 몸이 다 무너진 건 모릅니다. 성전 건축을 할 때가 안 되었다 하고 자기들 집만 짓던 그들과 똑같습니다. “몸과 혼과 영이 책망 받지 않도록 온전히 보존되도록 기도한다”(살전 5:23)는 말씀은 우리 몸이 성전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 시대의 성전이 어떠했습니까? 우리의 ‘몸’은 옛날 성막 성전의 ‘뜰’입니다. 네 곳의 문을 통해 ‘뜰’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네 문’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를 뜻하지요.‘ 문’안으로 들어가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고 ‘성소’로 들어갑니다. 우리의 ‘혼’이 ‘성소’에 해당됩니다. ‘성소’에는 ‘금 촛대’와 차려놓은 빵이 있는 상이 있습니다. 좌우로 여섯 개 여섯 개씩 진설 되어 있는 빵은 ‘성경 66권’을 뜻하지요.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지성소’는 그리스도인의 ‘영’에 해당됩니다. 대제사장들은 거기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먹고 ‘뜰’과 ‘성소’를 지나‘ 지성소’에 들어가서 기도할 떄 주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몸’과 ‘혼’과 ‘영’이 거룩하고 깨끗해져야 비로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몸’인 ‘성전’의 재건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거룩하고 깨끗해야 되는데, 요즘 성전이라고 하는 교회가 바벨론 종교로 포장이 되어있습니다. 부활절 토끼와 양초, 12월 25일 태양신 행사도 바벨론 종교에서 행하던 것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 때 종교를 이용했던 빌라도와 헤롯이 친구가 되고 선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옛날부터 그래 왔고 지금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갖 프로그램들로 꽉 차있습니다. 교회가 완전히 훼파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여기가 성전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속지 말라고 했습니다. 교회의 건물은 이미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학개 1장 2절의 “아직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때가 되지 않았다.”는 그들의 말은 오늘날 교회가 “주님이 언제 오시냐? 내가 주님 맞을 준비를 할 때가 지금은 아니다.” 하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못 보고 귀가 있어도 못 듣는 겁니다.
어떤 분이 “교회가 세상 얘기만 해서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이 교회 CD를 들으니 하나님 말씀만 전하네요!” 라고 말하며 전화를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제는 성전 재건을 할 때가 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이 없어서 몰랐다가 말씀을 듣고 이제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학개 1장 4절 말씀처럼 황폐한 하나님 성전 건축을 할 생각은 안하고 자기네 살 집이나 짓기에만 바쁘면 “너희는 많이 심었으나 적게 가져오며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고 마셔도 흡족하지 아니하며 입어도 따듯하지 아니하고 삯을 받는 자도 삯을 받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도다(학1:6)” 하신 것처럼 농사는 망치고, 먹을 것은 다 썩어버리고, 돈은 벌어도 다 새버리는 이런 일이 우리와 상관 없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금이 성전을 건축할 때입니다. 우리가 성전이 아닙니까? 몸도, 혼도, 영도 재건해야 됩니다. 성전을 우리가 다 헐어버린 것입니다. 재건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2장 3절에 “너희 가운데 남아 있는 자로서 이 집의 “처음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을 그것과 비교할 때 너희 눈에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했습니다. 옛날 솔로몬 성전에 들어간 금과 은은 엄청나지요. 600달란트가 넘습니다. 엄청난 금이지요. 다윗이 모든 재료를 준비해 남겨두고 간 것을 가지고 순금으로 영광스럽게 지었습니다.
예수 믿고 회개했을 때 몸이 날라갈 같이 가볍고, 말씀 읽고 전도하고, 얼마나 “영광스런 삶”을 살았습니까? 그런데, 그 “처음 영광”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에베소 교회 사람들이 우리가 일을 많이 했으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일한 것하고는 상관없습니다. 주님이 일 많이 했다고 상 주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선지자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님을 위해 일은 해야 하지만, 그보다 “깨끗하게 되어 주님의 신부가 먼저 되는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어 한 일은 상을 받습니다. 주님은 그의 신부가 되기를 기다리십니다. 신랑이 돈 벌어서 집 지어 같이 살 날을 준비하고 있는데, 신부가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돈 벌어오길 기다리겠습니까? 할 일은 안하고 역전 마당에서 사과 장사나 해서 돈 벌어오길 바라겠습니까? 아니지요. 가장 먼저 기다리는 것은 “신부 단장”입니다. 처음 믿었을 때 주님과 동행하면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누가 욕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 “처음 영광”을 엊그제의 일로 버려버리면 2장 7절에 “또 내가 모든 민족들을 진동시키리니 모든 민족들의 열망이 이르리라 그러면 내가 이 집을 영광으로 채우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한 그‘멸망’이 이릅니다. 사실, 모든 민족들이 바라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 분이 오셔야만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 “숨은 자, 남아있는 자들”이 있잖습니까? 그들은 기다리고 있지요.
그러나, 기다리지 않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그들에게 멸망이 옵니다. 오늘 학개서 2장 6절의 이 ‘멸망’은 히브리서 12장 26∼ 29절에도 나옵니다. “그때에는 그 분의 음성이 땅을 뒤흔들었거니와 이제는 그 분께서 약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한 번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뒤흔들리라고 하셨느니라 이 또 한 번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미 피조된 것들로서 흔들리는 것들을 제거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남겨 두시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릴 수 없는 왕국을 받으리니 은혜를 소유하자 우리가 이 은혜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되 경외함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케 하시는 불이심이라.” 시내 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셨을 때 땅이 진동했고, 가까이 오면 돌로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죄 있으면 바로 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 아시잖아요?”가 통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땅만 흔들렸는데, 올리브 산에 하늘 문을 여시고 이 땅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하늘도 진동합니다. 하늘이 두루마리처럼 말려가지고 타 버린다고 했습니다. 하늘이 흔들려 말려 올라가고 백 보좌를 보는 사람들은 심판 받고 불못으로 떨어지는 겁니다. 천둥도 나고 지진도 나면서 하늘도 흔들립니다. 몸 안의 성전이 파괴된 자들은 그렇게 멸망하는 겁니다.
그러나, 땅과 하늘이 다 흔들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받습니다. 성전의 기초를 놓고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는 왕국”을 받는 복(히12:28)을 받습니다. 말라기 3장 1절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하리라 또 너희가 찾고 있는 주가 갑자기 자기 성전에 오리니 곧 너희가 기뻐하는 언약의 사자니라 보라 그가 오리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하셨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오실 주님께서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성전의 기초”를 놓던 사람들에게는 “오늘부터 거슬러 올라가 아홉째 달 이십 사일 곧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았던 날부터 생각하라. 아직도 씨앗이 곳간에 있느냐 정녕 포도 나무와 무화과 나무와 석류 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아직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나 오늘부터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학2:18,19)” 하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준비한 사람들, 성전을 지으려고 그 기초를 놓으며 내 안의 성전 재건에 힘쓴 자들은 그 날부터 복을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는 복이 없었습니다. 깨끗하게 하려고 신부 단장을 준비한 날부터 복을 주시는 겁니다. 진짜 복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복이나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 앞에 준비되기 원합니다!” 하면서 “어휴, 아직도 이게 남아 있네?” 하며 항상 씻김 받는 자들에게 계시록19장, 스가랴14장의 “주님이 오실 때 멋지게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는 게 진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