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고무신과 새신 그리고 알과 얼의 철학
해설: ‘알과 얼의 철학’이 너무 어렵습니다.
왕초: 전에도 얘기했네만, 거지가 되면 어렵지 않아! 세상이 보이거든 … 그 보여지는 비밀 하나 내 말해주지. 황충이들, 메뚜기들은 한 철이야. 길어야 애벌레에서 죽을 때까지 다섯달인데, 이 메뚜기들이 지금 제철을 만나서 난리법석들이네. 하늘 대왕께서 뭐라 하셨나 하면 이 황충들은 “전장을 위하여 예비 된 말들 같고 머리에는 금 면류관 같은 비슷한 것을 쓰고 얼굴은 사람 같은 모습이고 머리는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다” 하셨네. 참, 아니, 말이면 말이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말 같고 사람 같다는 것은 또 뭔가! 거기다 금 면류관 비슷한 거고 남자도 아닌 여자의 머리털 같은 머리털이라니, 이해가 되시는가? “계구칠팔” 이라고 거지 족보 비밀편 아홉장 일고 여덟째 줄이에 있네. 찾아 읽어보시게나. 계구칠팔이야. 잊지말게.
얘네들이, 뿔 달린 도깨비들인데, 그게 메뚜기면서 꼭 사람처럼 위장하고 나타난다 이 말씀이야. 사람 같으니까 속아넘어가지, 도깨비로 보이면 누가 속겠나. 그게 비밀이네. 말세에 악한 것들은 절대로 내가 도깨비다 하고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아요. 걔네들은 점잖고 품위 있고 금발의 미녀들처럼 외모는 아름답고 우아한데다가, 머리에 금면류관까지 썼으니, 금 면류관이 뭔가? 왕의 권세, 승리자의 영광을 누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거야. 같은거지 같다는 것은 아니야. 겉 껍데기만 그렇지. 속은 늑대 새끼예요. 그래가지고 얼빠진 것들을 주워삼키기 시작하는데, 이게 아주 공격적이라. 꼭 옛날 기마병 같이 훈련된 전투마를 타고오듯 달려든단 말이야. 잘 생겼지, 말 잘하지, 힘 세지, 능력 있지, 안 당할 자가 누구겠나? 그런 고무신들을 조심하게. 그것도 신이라고 신 흉내를 내니 …
40
제5화
고무신과 새신 그리고
알과 얼의 철학
원작: 이요한 / 최아멘
나오는 사람들
36 왕초, 최선생, 똘만이, 해설
해설: 오늘은 어디 갔다가 나오셨습니까?
왕초: 요단강 대합실.
해설: 요단강 대합실이요? 거기가 어딥니까?
M 다방이라고, 우리 할 일 없는 늙은 거지들이 모이는데야. 나, 참, 거기도 웨이팅 리스트가 있어. 손님 대접할 커피를 받아 올라고 줄을 서 기다리는데, 아, 이 양반이 그 새를 못참고 전화를 해대는거야. 그래서 “네, 저는 지금 요단강 대합실에 있습니다” 그랬지, 알아듣더라고 …
해설: 그랬군요, 오늘은 무슨 말씀으로 시작하시겠습니까?
왕초: 고무신 이야기를 하지. 우리가 가난하던 어릴 적엔 엿 바꿔 먹을게 헌 고무신이 최고였지. 하루는 엿장사가 왔는데, 바꿔먹을게 있어야지. 해서 우리 누님 몰래 멀쩡한 내 고무신을 냅다 콩크리트 바닥에 갈아대다가 누님께 그만 들켜버리고 말았어. 엿장수 할배가 새 신을 갖고 나오면 혼을 내주거든, 그래서 헌 신을 만들겠다고 어린 마음에 그랬던게야. 갈아대니 신바닥에 구멍이 났는데, 누님 왈, “이눔의 시키, 왜 멀쩡한 신을 구멍내냐?” 내 하는 말이, “비 오면 물이 새 들어오는데, 도도체 구멍이 보이질 않소. 들어오는 구멍이 있으면 나갈 구멍도 있어야 할 것 아뇨? 그래서 구멍을 내는 중이오” 이랬다가 뒤지게 두둘겨 맞았지. 그 고무신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신이라는게 문제지 …
해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왕초: 우리가 신발을 신고 다니지 않는가? 그 고무신이 아니라 “새 신”을 말하는거네. 높으신 분의 아들인 그 분이 신이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신의 아들이고, 내 속에도 신이 있다, 그 말씀이야.
37
내 발에 헌 신발짝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거룩한 신이 거해야 한다는 말이네. 그런데 이 잡것들이 새 신을 귀신, 잡신, 무당신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네. 새 신을 신고 펄쩍 뛰지말고 물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아 올려야 하는데 이 것들이 잡으라는 물고기는 죄다 놓지고 그만 고무신만 떠내려 보내버리고 말았네 그려! 물고기 대신 새 신을 신고 귀신을 잡다가 그 놈의 귀신에 홀려 고무신만 떠내려 보낸 꼴이야! 그 떠내려간 신짝들이 저 태평양 앞 바다에서 “내고향으로 날 보내주~~~” 하고 있어요! 으이그, 속 상해~~~ 이봐, 새 신이 있으니 헌 고무신은 이제 필요 없네. 엿이나 바꿔 먹게. 언제까지 그 고무신만 붙들고 있을겐가? 쯧, 쯧, 쯧 … 한심하이~
해설: 왕초께서 철학도 하시고, 수학도 잘 하시고, 그림도 잘그리시는데, 돈 버는 일만 못 하신다면서요?
왕초: 1+1=2가 되는 건 산수 수준이고, 우리네 상거지는 고등 수학을 하는 사람들이야. 거지 족보엔 산수를 세상 초등 학문이라고 하네. 초보에 머물지 않고 단단한 음식을 먹으면 고등 수학을 잘하게 된다오. 이젠 자네도 단단한 식물을 먹게나. 산수는 1차원이고, X와 Y가 만나면 2차 방정식이지. X Y Z가 만나는 점이 3차원이고, 그게 하늘과 땅과 사람이 만나는 입체 방정식이야.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지. 수준을 좀 높여 세상을 봐야하네. 저 높으신 분은 4차원에 계시네. 그 분이 만들어 놓으신게 “얼” 이라고 하는거야. 4차원에서 왔으니 알 리 없고, 그 정신 나간 사람을 “얼빠진” 사람이라고 하고, 넋 나간 사람, 얼이 떨어져 나간 사람은 “얼떨떨하다”고 하지. 족보에는 “얼을 영” 이라고 하네. 얼과 얼들이 어울려 잘 사는 것을 “어울린다” 고 하고, 그 얼들이 맞장뜨며 쌈박질 하자고 달겨들 때 “얼러볼래?” 한다오. 조선 민족들은 얼이 눈에 보이는 것을 “알”로 말하기도 하네.
38
여자가 정신차려 살림을 잘하면 “알뜰한” 새댁, 정신차려 뭘 하나 제대로 하면 “알차게” 했다고 하네만, 결과적으로 알과 얼은 같은거야. 얼이 살고 영이 살면 알이 되는 것을 아시겠나? 알을 가지셨나, 이말이네. 알겠다는 말은 알을 받았다는 말이지. 그런데, 이 “얼”을 갔다버린 사람들이 있어. “얼간이들” 이지. 얼이 어디 간 사람, “얼간이들” 이 너무 많은 슬픈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은가? 사람이 얼이 빠지고 얼이 가버리면 세상은 알맹이 없는 엿장사 구르마 속 골동품 고물상이네. 그런 사람은 폐기 처분 대상 1호, 인분 제조기가 되는거야. 그런 인간들이 뒤로 쏟아낸 것이 화장실 파이프를 타고 바다로 흘러들어가 저 롱비치 앞 바다를 얼마나 더럽게 해놨는지 아시는가? 이 놈들아, 네 놈들이 싸질러 놓은게 저 바다에 둥둥 떠다닌다, 그 물을 다시 받아 처먹는 꼴들이라니! 이거야, 참 … 그 떠내려간 고무신짝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하고 거기에 모였네 그려~~~ 에라, 이 얼간이 같은 놈들아, 고무신도 신이냐? 새 신을 신고 이젠 이 망해가는 세상, 발 바닥에 땀 좀 나게 뛰어 다니거라! 할 일이 많은 이 세상, 이젠 새 신을 받아 닫혀진 책뚜껑 열고 감춰진 속내, 비밀을 풀어놓을 때다, 이말이네. 남자든 여자든 영을 부어 주면 그 비밀이 풀린다고 거지 족보 비밀편에 써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그 영을 받아 먹고 얼이 꽉 찬 알이 되거라! 그래야 나그네 거지 되어 이 험한 세상을 알차게 사느니 …
39
해설: 머리가 뱅뱅돕니다.
왕초: 그럴거야. 우리 이쯤에서 머리도 식힐겸 최선생 불러내세. 그 양반도 만만치는 않지만 … 최선상 ~~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최선생: 전화를 하다가 어느 집에서 한 번 와보라는데 차가 있나 길을 아나 … 나가서 길을 물으니 버스를 타고 가라는데 버스는 또 어떻게 탄다? 한국 같으면 오라이 발차 하는 차장이라도 있으련만, 여긴 웬 버스가 전자동에다가 말 안통하는 사람들만 운전사니 … 물어 물어 가르켜준 차를 올라타니, 차비를 내야 하는데 쿼러가 뭔지 다임이 뭔지를 알아야 해먹지. 그래서 기사 보고 니가 알아서 가져가라는 듯 돈을 손에 펴보였더니 아저씨는 그 큰 눈만 멀뚱멀뚱. 이민국 앞에서 택시를 탈 때도 그랬고,신문 살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정말 우리 장인 어르신이 눈물나게 고마웠어. 김밥값을 걱정하고 있을 때 건네주신 그 흰 봉투! 한국에서도 땡전 한 푼 안 쓰더니, 여기와서도 숙이네가 준 돈으로 버티는구나 하는 그 생각에 정말 고마웠어. 그 돈이 없었으면 난 “넌 버스비도 없냐?”는 꾸중을 들을판인데, 할 말 없게 된 처지에 구걸하는 거지꼴까지 될 수는 없는 일, 아, 선견지명이 있으신 우리 어르신,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놈아 너무 기 죽지 말아라. 이제 취직만 되면 나도 이제 돈을 번다. 오냐, 보라는 듯이 갚아줄게. 쓰고 남은 백불도 안 되는 돈으로 난 그렇게 미국 생활을 시작한거야. 혹시나 하고 찾아갔는데 된 첫 직장! 그 곳은 맘 좋은 아저씨가 하는 작은 인쇄소였어. 일주일 동안 서너번 비행기만 갈아타다가 오자마자 일부터 시작하는구나! 그게 밟아라 삼천리, LA 아리랑의 시작이었지. 한 달 일하고 세금 빼고 받아쥔 800불!
41
누구 말처럼 월급 타 월세 내고 나면 오징어 한 마리 사먹을 돈도 남지 않는 돈! 그래서 부부가 맞벌이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났어. 지금이야 어머님 댁에 얹혀 사니 집세는 나가지 않지만, 이제 곧 독립해야 할 터, 그 돈으로는 턱 없이 부족했지. 일을 하며 귀동냥으로 미국 생활을 익혀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낮에 일하고 밤에 일하고 주말에도 뛰는 THREE JOB을 가지고 앞만 보며 달려가고 있었어. 돈 독이 오른거야. 덕분에 고생을 허벌나게 했지. 낮에 8시간 일하고 와서 반갑게 맞아주는 이 하나 없는 집을 밥만 얻어 먹고 탈출해 밤 일을 나갔다가 또 집에 와서는 옷만 갈아 입고 일하러 가는 그런 채바퀴 돌리기, 다람쥐 인생이 된거야. 그러니 어디 이 직장 저 직장 시간 맞추기가 쉬워야지. 버스에서 내려 잽싸게 뛰어가 길 건너 저 쪽에서 오는 버스를 집어타야 되는데, 신호등에 걸리면 영락 없는 30분 지각이었지. 그게 두 달만에 중고 니산 센트라를 사야만 했던 이유야. 낮에 일하고 밤에 어떻게 또 8시간이냐고? 이 나라는 24시간 돌아가는 동네야. 밤 일은 주유소에서 했는데, 캐셔밬스는 방탄유리로 돼있고, 새벽 두 세시쯤이면 손님이 거의 없지. 책상에 머리 박고 대충 자는거지 뭐. 그러다가 손님이 두드리면 놀라 깨고 … 어느날 동네 토박이가 일렀어. 쟤는 밤에 일하러 와서 잠만 잔다고 … 짤리면 또 다른데 가고 … 그렇게 일에 미쳐 날뛰는 미친 망둥이가 되고 말았어. 차 뒤에 따르릉 사발 시계를 맞춰놓고 점심을 5분만에 물에 말아 허겁지겁 먹고 자다가 종치면 일하러 뛰어들어가던 시절을 보냈지. 어느날 앞이 깜깜해졌어. 눈 떠 보니 병원이래. 과로로 쓰러지자 주인이 실어 보냈데. 다음날 출근하니 관두래. 그러다가 죽는다고 그만 일하래. 그래서 찾아간 곳이 산타모니카 바닷가야. 직장이야 또 구하면 되는거고. 운전해 바다로 나가면서 생각했어. 우리 숙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숙아, 나 또 짤려서 지금 바다로 간다.
42
바다 바람은 역시 시원했어. 그 바람에 내 목소리를 날려 보내기시작했어. 바다 건너엔 숙이가 있는 한국, 서울을 향해 그녀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있었어. 숙아, 내가 지금 가고 있다. 이 오빠는 바람을 타고 이 태평양을 넘어 간다. 울지 마라. 이 오빠가 있다.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남 밑에서 일하는 그런 서러움은 모르게 해줄게 … 그렇게 얼마나 외쳤을까? 숙이는 듣고 있는걸까? 무슨 대답이라도 들었으면 좋으련만 바다는 역시 아무 말이 없었어. 하긴, 들릴 리가 없지. 나는 또 바보짓을 하고만거야. 그래도 생각해야 했지. 숙이가 오면 사장님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 그래야 도둑질에 강도질까지 한 책임을 면하니까, 이 고생은 당연하다고 생각 했지.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어. 모래 사장에 써 놓은 숙이 이름을 그 놈들이 다 지워버리고 있었어. 안돼, 지우면 안돼! 이름을 부르면 메아리만 치고, 써 놓으면 지워버리고 …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녁 해마져도 바다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어. 그 놈이 또 나타났어. “최민, 정신 차려. 이제 밥 먹고 밤 일 나가야지.” 나쁜 자식, 일에 지쳐 쓰러져 짤렸는데, 다시 일만 하라니 … 그 소리에 하는 수 없이 나는 차를 향해 걷고 있었어.
똘만이: 하이고, 우리 최선생 대단하고마! 워째 그리 밤낮 일만 하고 살았뻔진겨?
왕초: 이 보게, 빚 갚아야지. 그 빚 못 갚으면 진짜 도둑놈 되는거 몰라? 고무신을 신어서 그래.
해설: 왕초의 말씀대로 우리는 새 신을 신고 펄쩍 뛰어야 합니다. 그 당시 최선생이 새 신을 받았다면 산타모니카 바다는 물고기를 낚는 바다가 되었을지도 모르지요. 지는 해를 바라보며 하염 없이 숙이의 이름만 불러대며 눈물 짓던 그 바다, 거기서 최선생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사십니까?
43
혹시 밤 낮 일만하다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진짜 거지 됩니다. 이제 갓 이민을 와 LA 아리랑을 시작하는 우리의 최민, 그에게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원님과 거지 이야기” 같은 주제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그저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쓰며 살았겠지요. 그러한 삶을 왕초는, “고무신을 신고 헤메다, 그 신 마저 물에 떠내려보낸 삶”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최민은 바다에서 잃버린 자기 고무신을 발견했을까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던 그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다음 시간에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