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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교의 뿌리, 배교의 확산, 배교의 열매
배교(Apostasy)란 무엇인가에 대해, 배교의 뿌리가 무엇이고 어떻게 확산되는 것이며 결말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20세기 최고의 “교회사가”이자 “실천신학자”인 분에게 자문을 구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피터 럭크만 박사입니다. 그의 신약교회사는 배교에 대해서 뿌리를 밝혀놓았습니다.
흔히 피상적으로 종교는 원시종교에서 현대종교가 되었다고 하는 세상 학자들의 세뇌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은 기독교를 “고등종교”라고 부릅니다. 반면 부두교나 에스키모, 인디언들의 샤머니즘은 “하등종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종교란 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숭앙하려고 인간이 애쓰는 행위를 일컫습니다. 그 수단이 틀렸거나 맞거나 둘 중 하나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우상을 섬기는 종교와 참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와,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후자, 참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숭앙하는 종교가 변질되어서 전자의 우상숭배가 생기는 것입니다. 항상 나쁜 것은 좋은 것이 비틀리고 부패해서 나오는 것이지 나쁜 것에서 좋은 것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즉 참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종교가 부패 변질이 되어서 각종 종교가 나온 것이며 그 역순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법칙은 럭크만 목사에 의해 정의된 바 “하강의 법칙”, 과학자들은 이것을 “엔트로피의 법칙, 열역학 제2법칙”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반진화론”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며 “긍정적 사고방식”의 반대편에 있는 “부정적 사고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제사장이 두 종교를 들고 나왔는데 두 가지의 경배와 두 가지의 제물이 준비되었습니다.
그 차이점은 명백합니다. 카인이라는 이 최초의 제사장은 저주받은 땅(아담의 죄로 저주받은 땅)의 산물들(곡식과 채소와 과일과)을 가지고 죄값을 지불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두 번째 제사장은 아벨인데 그는 저주받은 땅에서 나온 산물 대신 하나님께서 모형으로 보여주신 속죄의 방법, 즉 최초의 인간을 죄의 정죄에서 건져 주시는 동물 희생 제사의 방식을 따라서 순종하고 피의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제물이 등장합니다.
다른 차이는 전혀 없습니다. 카인은 신실하며 헌신적입니다. 그가 살았을 당시에 로마카톨릭 교회가 있었다면 그는 아마 사순절을 지키고 금요일에 고기도 먹지 않고 채찍으로 스스로를 치고 고행하며 성지순례를 다녔을 것입니다. 그가 이슬람교의 회원이었다면 하루에 다섯번씩 메카를 향해 머리숙이고 금지된 것들을 먹지 않으며 절기들을 지키고 가난한 자들을 도와줌으로써 하늘나라를 가려고 했을 것입니다. 유대교였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교들이 모두 잘못된 것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유대교는 거기서 예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게 언약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언약은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고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며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성취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직 메시야를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로로 값없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으며 인간의 희생과 봉사와 노력 없이 하늘에 갈 수 있다는 것과 인간의 노력과 헌신으로 그렇게 할수 있다고 믿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후자의 사람들은 매우 “종교적”이며 신실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습니다. 만일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존경을 받기 시작하면 그 종교는 곧 부패되고 형식적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 세대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수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만 믿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예견되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오라, 그리고 “좁은 길”을 걸어라 라고 하신 명령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이 문은 “넓은 문”이 되지 않습니다. “넓은 길”도 아닙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넓은 문이라고 해서 쉽고 편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이 고난과 박해 때문에 좁다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는 조건은 어렵지도 고생스럽지도 않습니다.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그분께서 친히 육신을 문으로 삼으셔서 그 육신을 십자가에서 찢겨지게 해서 하늘로 가는 문의 휘장을 제치셨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이 할 일은 단지 활짝 열린 문을 당당히 걸어들어가는 일만 있습니다. 무엇이 어려운 것입니까? 그 길은 쉬운 길입니다. 쉽다는 것은 이미 통과한 사람의 관점에서 너무 쉽다는 것인데, 통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신 포도”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솝은 영감받지 못한 이교도 우화집을 만들었지만 이런 쓸만한 이야기도 더러 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솝은 솔로몬에게서 지혜를 빌려와서 그의 우화집을 썼습니다. 비슷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신 포도”, 내가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을텐데, 그게 귀찮고 부질없어 보여서 노력도 해 보지 않고 저건 신 포도일거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좁은 문으로 못 들어가도록 막으신 게 아닌데 인간의 하찮은 판단력으로 그것은 어렵다, 생각하고 다른 길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세상에 처음 전파된 이래 항상 복음은 “종교”와 싸워 왔습니다. 종교는 “단번 속죄, 구속” 이런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종교가 존재한 이유는 인간이 항상 불완전한 죄인인 관계로 끊임없이 신의 노여움을 누그러뜨릴 희생제물을 계속 바치고 이로 인해서 세상에 유익을 주고 사람들에게 구원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물론 창조주를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들조차도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이런 세상 종교인의 수준으로 전락해서 생명얻는 회개, 즉 요한이 율법시대 마지막 선지자로 와서 가르쳐 준 그 회개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이후 유대교가 걷게 될 전락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유대교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또 다릅니다. 지금은 그 당시보다도 더 못합니다. 불교나 모슬렘이나 샤머니즘보다 더 유치해 졌습니다.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성경만이 구원이 있는 것이라는 인식도 희미해졌고 “종교적”인 것만 추구하면 다 만사오케이입니다.
배교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파하면서 회심자가 늘어나자 그는 학교를 세웠습니다. 두란노에 성경 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때는 신학교라는 게 있지 않고 성경 학교입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서 시대와 세대를 구분하고 은혜복음이 무엇이고 율법과 어떻게 다른지 공부하고 구원이 어떻게 보장되는지 알고, 그런 것이 성경 지식입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은 모두 복음증거자와 교사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없었는데도 이런 배움을 통해서 급격히 확산된 것입니다. 지식없는 열성은 요한의 침례만 알았던 “아폴로”처럼 바로잡혀져야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성도의 본질을 하나님께 속하게 만들지만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그 본질조차도 빛이 흐려지고 그는 마귀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육신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육신을 통해서 마귀가 성도를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게 되면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대로 써먹고 이 상황에서는 자기 좋은 대로 이 말씀, 저 상황에서는 저 말씀, 자기 생각대로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신 지혜가 아니라 성경을 남용하는 것이고 진리를 부패시키는 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오직 성경만이 당연한 진리였지만 다음 세대에서는 진리 대신 진리와 유사한 많은 것들이 유입되었습니다. 신학자 부류가 등장하기 시작해서 교리에 대해 주석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그 주석과 편지와 논쟁들이 성경보다 더 읽혀짐으로써 성경이 잊혀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오늘날 부흥을 외치지만 성경이 중심에 없고, 교회성장을 말하지만 성도들의 믿음의 성장, 성경을 중심에 놓은 성경적 지역교회가 아닌 교단의 성장을 말하는 것 같이 됩니다. 논쟁을 일삼은 신학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은 “복음에 대해” 논쟁하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지속적으로 교회를 핍박해서 성경을 불태우고 바른 영적 지식을 지워버리기 위해 발악했습니다. 그래서 박해시대의 거의 끝에 가서는 성경이 대부분 소실되고 성도들은 불같은 시련으로 믿음은 투철해졌지만 지식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서 로마교회가 마침내 “기독교화”되고 기독교를 공인한다고 했을 때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분간할 영적 분별력을 가진 “성경교사”가 많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다 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멈춘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로마카톨릭 교회에 가담해서 회원이 되고 복음과 전혀 다른 이질적 이단교리들, 즉 침례(세례) 중생이나, 유아세례, 교회국가, 행위구원을 받아들이고 카톨릭 국가 시민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역사 전반기에 일어난 “배교”였습니다. 이 때도 복음전파가 있었고, 그 다음에 학교들이 세워졌는데, 학교들이 철학자들에 의해 점령당한 후 “신학자 무리들”이 나왔습니다. 이들은 변론을 일삼으며 믿음에서 떠났고 그 후세는 성경 대신 학자들의 주석과 변론을 더 보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성경을 빼앗아가자 영적 암흑이 왔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더 편한 길을 택한 후 영적으로 잠에 빠졌습니다.
이 사실은 부흥이 오면 그 다음에 영적 암흑이 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교회역사의 후반기에도 부흥이 있었고 그 다음시대에 영적 침체와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그 암흑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부흥은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서 전 지구에 찾아왔는데 이 때는 지구상의 모든 마귀의 본거지들이 바른 성경에 의해 죽을 지경으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거의 궁지에 물렸던 것이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어 이러다가 이대로 천년왕국이 와 버리는 것 아닐까” 할 정도로 “십자가 깃발”이 거침없이 전 세계를 정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이 16-19세기의 필라델피아 교회시대(계시록)였던 것인데, 이 부흥의 절정기에 배교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인본주의적 철학자들이 등장해서 성경 학교 대신 “신학교”들을 세웠습니다. 독일, 영국, 나중에 미국에 세워졌는데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처음에 그런 “신학교”였습니다. 여기서 성경만이 아니라 철학, 과학, 인문학이 대거 가르쳐지면서 “성경절대주의 믿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나온 자들은 사회혁명가들이 되고 철학자들이 되었습니다. 정치가들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기존에 복음증거자들이 뿌려놓은 복음에 따라서 “확장된 기독교 세계”에 뒤따라서 이들 “기독교 사회개량가”들이 등장해서 거듭남 없이도 세상이 좋아지고 발전한다는 진화론을 유포했습니다.
절대로, 못 살고, 망해가는 나라에서, 한끼 먹을 걱정이 태산인 동네에서 진화론이 인기를 못 얻습니다. 공산주의도 그런 데서는 사실 인기가 없습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 문물”이 들어와서 복음이 알려졌고, 사람들이 최저 빈곤에서 벗어난 상태, 그리고 서구식 교육이 자리잡은 곳에서 진화론과 공산주의가 꽃피는 것입니다.
러시아가 왜 공산화되었는가, 만일 러시아가 절대 군주 짜르의 지배하에 농노와 귀족만 존재하는 피라밋 구조 사회로 쭉 갔다면 혁명은 안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러시아 군주들부터 귀족들까지 계몽주의에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계몽주의는 곧 사탄주의입니다. 그래서 사회계몽운동이 일어나고 백성들이 “성경 대신에” 인문학을 흡수하기 시작합니다. 공산주의도 확산됩니다. 그래서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역사 후반기 즉 A.D1000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배교는 두가지 사탄의 전략 무기에 의해 수행되었습니다. “진화론”과 “공산주의”입니다. 저는 “자본주의”는 곧이 넣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돈을 하나님보다 더 애지중지하고 사랑함”의 사상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 가운데 하나로서 굳이 자본주의라고 열을 낼 필요가 없이 인간의 죄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진화론”과 “공산주의”는 죄성을 마귀적 방법으로 훨씬 악독하게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빨 좀 썩게 만드는 사카린이라면 진화론, 공산주의는 “하수도 식용유”입니다. 훨씬 악독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 이 두 사악한 괴물을 유입시키기 위해 사탄은 오래 작업해 왔고 그로 인해서 20세기 이후 교회들은 복음 전파의 원동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마귀의 이론은 사탄의 “학교들”을 통해서 확산됩니다. 바로 세상 “공립 학교들”이 주범입니다. “신학교들”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어떻게 신학교가 공산주의를 가르치는가, 가르칩니다. 그것이 해방신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사회참여”를 말하는 것, YMCA, WCC, YWCA, 무슨 기독교 연대들, 다 그것입니다. 이것들은 교회의 범위를 이탈해서 기독교의 명분으로 “사회를 개조하겠다”고 덤비는 망동입니다. 요새는 기가 막히게 “기독교 교도소”까지 한국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인성 순화의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고 심리 테스트도 수시로 실시하며 죄수들을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처우를 잘 해줘서 범죄 재범률을 낮춘다고 자랑합니다. 아니, 언제 교회가 “교도소” 운영하라고 이 지상에 사명을 받고 보내심을 받았느냐 하는 것인데, 이 “소망 교도소”라고 하는 시설 만든 사람들은 사실 “사회 개량주의”를 실천하는 사회운동가들이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그 교도소에서 성경 공부를 시킨다고 한들, 배교한 변개된 성경 가지고 거짓교리를 가르칠 것이며 순화시킨 인성이야 사회에 나오면 마귀가 또 미혹해서 죄짓게 하면 그만입니다. 썩을 것들을 영원한 것들 위에 놓고 사회를 개량하려는 자들은 결국 썩을 것을 심어 썩을 것으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정리하면, 배교의 뿌리는 기독교를 “믿음”이 아닌 “학문”으로 변질시키는 데서 출발합니다. “성경 공부”가 아니라 “신학 공부”로 변질되면서 시작됩니다. “성경 공부”는 지혜와 지식과 영력을 주지만 “신학 공부”는 의문과 두려움만 낳습니다. 신학 공부를 정말 하려면 성경 공부를 제대로 한 후에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신학교들은 거의 대부분 신학을 가르치며 성경은 저 멀리 팽개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것들은 현대 신학의 신학자들의 비성경적인 쓸데없는 “사회개혁론들”, 따져보면 기독교 맑시스트들의 사상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배교의 확산은 이런 자들의 모임과 교회가 기독교계를 팽배하게 채웠을때를 말합니다. 그 열매는 그들보다 두 배 악한 마귀의 자녀들이 그들로부터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이단들의 확산입니다. 행위구원론은 필연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대의 기독교 사회개량주의자들은 복음도 믿고 사회도 복음의 힘으로 좀 좋게 만들자는 선한 취지라도 있었습니다. 한국에 개신교의 주춧돌을 놓은 서구 선교사들도 그런 부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 사회사업가들은 기독교 맑시스트들입니다. 그들은 “사회 개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고 하는 마귀적 명분을 가지고 기독교 사업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정계에 재계에 기독교인들을 침투시켜서 사회를 기독교적으로 재편하면 좋은 세상이 올 수 있다고 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과 “카이사의 것(마귀의 것)”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능멸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그 구호에 속아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특히, “민족 복음화”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유대 민족 외에 “민족 복음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방 민족은 없습니다. 태평양 어느 섬나라가 전체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한들 그 나라가 복음화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식들이 정부기구를 통치하기 때문이고 그게 세상 법입니다. 이 세상 법은 카이사의 법이지 성경 66권이 법이 아닙니다.
하물며 민족 복음화라..그러면 대한민국 국회가 전부 기독교인이 되면 기독교에 유리한 법을 제정하고 교회를 지원해 줘서 복음화된 한국이 된다는 그런 식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사회개량주의인데, 엄청난 미혹이고 속임입니다. 복음으로 해야 할 일은 쓸데없는 사회를 개량하고 제도를 손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배교의 열매는 WCC와 같은 혼합주의가 맞습니다. 여기에는 마귀가 조제한 모든 거짓교리들이 총체적으로 발견됩니다. 기독교 사회개량, 긍정적 사고방식, 기독교식 공산주의, 로마카톨릭. 문제는 누가 이 독배를 마실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독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은데 피할 사람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 밖에 없습니다. 처음부터 알게 모르게 조금씩 속아왔다면 피할 수 없습니다. 로마카톨릭의 성경을 사용해 온 사람들이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로마카톨릭 교리를 받아들인 자들이 피할 수 있을까요? 행위구원을 믿고 끝까지 견뎌서 구원얻으라고 가르치는 자들은 이미 독배를 마신 자들입니다.
배교의 열매는 “로마로 돌아가는 것”인데 “적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좁은 길”을 치워버린 후 진화론과 기독교식 공산주의로 장님을 만든 다음 줄줄이 소세지 비엔나처럼 로마라는 화덕으로 직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배교를 피하고 자신을 거룩하게 지키는 길은 “종교개혁 성경, KJV”와 필수 필연적으로 상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되, 진실되이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 학문과 철학과 현대 신학이라는 찌꺼기들을 버리고 순수한 것들을 분별하고 붙잡아야 합니다. “세대주의 신학”은 오직 재림만 소망하고 휴거만 삶의 최우선 목표로 세우고 바른 믿음의 실행을 하며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 외의 다른 것들은 부패를 잠시 막을 수 있는 듯 보여도 결국 쓰레기 하치장(로마, 적그리스도)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바로 세운다는 것은 이 시대에 어느 교회가 부패와 배교로 갔다고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이 시대의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은 관속에 누워 묻히기를 기다리는 시체처럼 죽은 마귀의 교리들을 먹고 있지 말고 거부하고 나와서 “내 백성아 그녀에게서 나와서 그녀의 재앙들을 받지 말라”는 말씀대로 배교한 사탄의 교회(로마카톨리과 친카톨릭 교회들)로부터 분리하는 것입니다.
제가 친카톨릭이라 표현한 그 교회는 명목상 카톨릭을 반대하는 척 하면서 카톨릭 교리를 실행하는 행위구원파 교회들도 포함해서 말합니다.
*출처: 빛과 흑암의 역사 (http://cafe.daum.net/aspire7/9z5w/6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