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열성을 내었고 종교지도자로서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기를 원했으며 부유한 삶을 살면서 어떤 사람들로부터도 박해나 조롱 당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조롱하는 삶을 살았으며 삶 속에서 어떤 곤경 같은 것들은 그와는 상관이 없는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겸손해 진 후에 옛날 자신처럼 육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보면서 그들이야말로 개들이며 그들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변화되어 이제는 영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고 더 이상 육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신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야말로 진정한 할례파라고 증거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거듭난 후에는 그야말로 이 땅에 나타나신 그리스도 예수처럼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그분의 사람과 성품에 대하여 자세하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는 그가 그 앞에서 연한 싹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이며, 그는 모양도 우아함도 없으시니 우리가 볼 때에 그를 흠모할 아름다움도 없음이라. 그는 사람에게서 멸시받고 거부되었으며 슬픔의 사람이요 질고에 익숙한 사람이라.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그로부터 숨긴 것같이 그는 그멸시 받았고 우리는 그를 존중하지 아니하였도다. 실로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지었는데도 우리는 그가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당한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허물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고 그는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상하였도다. 우리의 화평을 위한 징계가 그에게 내려졌고 그가 맞는 채찍으로 우리가 치유되었도다. 우리는 모두 양같이 길을 잃어 각자 자기의 길로 돌이켰으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도다.”(사 53:1-6)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에 주님께서 가난한 삶을 사셨다고 증거했습니다:
“너희가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거니와 부요하신 분이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것은 그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를 부요하게 되도록 하심이라….기록되기를 ‘그가 멀리 흩뜨리시고 가난한 자들에게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남음이라 함’과 같으니…”(고후 8:9; 9:9)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가 받을 모든 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들을 그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대신 받으셨던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참된 본을 보이시고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하여 은혜를 받아 영원한 생명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자신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여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셨으며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은 자기에게는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6(마 10:38; 16:24).
다시 말해서 그분의 말씀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참 제자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을 버리고 주님처럼 모든 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들을 당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모습이 삶 속에서 나타날 수 없으니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의 되어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은 죄들로 인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자신으로부터 생명의 향기처럼 나타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손실로 여긴다고 자신의 삶을 증거하면서 그가 가장 고상하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들을 손실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똥)같이 냄새 나는 것들이기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고난 가운데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와 항상 교제하는 가운데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받아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가 바라보는 푯대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그리스도의 날에 부활하여 그와 같이 변화되는 날만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 휴거의 날에 대하여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아주 자세하게 편지로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 편지할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증거한 것입니다(딤전 2:4). 그리스도의 복을 믿어 혼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알아야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깨달아 주님과 신비로운 교제를 할 수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또한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에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나의 환난에 동참하였으니 잘 하였도다.”(빌 4:13-14)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그분과 함께 신비로운 교제를 통하여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모든 것을 이기고 주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같은 증거를 했습니다: 그가 육체 안에 있는 가시로 인하여 세 번이나 간구하였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충분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게 됨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는 오히려 그가 약한 것을 자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거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는 이런 삶을 통하여 그가 처한 약함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 속에서 의 삶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고 증거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오히려 강하게 된 것을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다음으로 많은 고난과 박해를 받았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참수당하는 곳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와 고난의 신비의 교제들 속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능력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뒤에 남겨놓고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 속에서도 앞으로 제자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엄청난 박해와 복음을 당해야 하는 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제야 믿느냐? 보라, 너희가 각자 자기 집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남겨놓을 때가 오나니, 실로 이미 왔노라. 그러나 나는 혼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내가 이런 일들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화평을 지니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것이나 기운을 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