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왕 다윗은 그 당시 이방인나라들 위에 군림하는 이른 바 최상의 상태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영화를 누리고 있을 때 그를 높여주신 하나님을 잠시 잊어버리고 간음과 살인 죄를 지었을 때 그 한 번의 죄로 인하여 그의 삶 에 엄청난 재앙들이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죄를 지은 후에 선지자 나단이 와서 그의 죄가 얼마나 큰지에 대하여 말했을 때 비로소 그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서 조성되었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마음에 있는 진실을 원하시오니 주께서는 감추어진 곳에서 나로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깨끗게 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더 희게 되리이다.”(시 51:5-7)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에 나타난 그의 기도는 그가 늙어 기력이 떨어지고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이 왔을 때 그리고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깨닫고 하나님께 거의 마지막으로 드리는 고백의 기도인 것입니다:
“보소서, 주께서 내 날들을 손 너비만큼 주셨으므로 내 연수가 주 앞에서는 없는 것 같사오니 진실로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사람마다 헛된 그림자같이 걸어다니며 진실로 그들이 헛되이 분주하니 재물을 쌓으니 누가 그것을 가질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8-9)
지금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 사실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또 “공수래 공수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을 때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다는 것과 깨닫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아는 데서 끝나지 않고 깨닫게 되면 깨달은 것이 삶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다윗 왕은 그의 삶이 더 이상 이 세상에 눌러 앉아 사는 삶이 아니고 “주와 함께하는 타국인(stranger)이요, 체류자(sojourner)이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다윗은 그가 살고 있었던 세상은 하늘에 가기 전에 잠시 여행하는 외국인처럼 사는 것이며 체류자라는 것 역시 그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잠시 기거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짐승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존귀할지라도 오래 살지 못하니 그가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 그들의 이 길이 그들의 미련함이니 그들의 후대가 그들의 말을 증명하리라. 셀라. 그들이 양처럼 음부에 있으니 사망이 그들을 먹으리라. 또 정직한 자가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거처에서 떠나 음부에서 소멸되리라…..누군가가 부해지고 그 집의 영화가 커질 때 너는 두려워 말라. 이는 그가 죽으면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니 그의 영화가 그 사람을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기 혼을 축복하였고 네가 네 자신에게 잘 행하여 사람들이 너를 칭찬할지라도 그가 열조에게로 가리니 그들이 결코 빛을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자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시 49:12-20)
진리를 깨달은 다윗 왕은 그가 깨달은 후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기다리겠나이까?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나의 모든 죄과에서 나를 구하소서. 나로 어리석은 자의 질책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벙어리가 되어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니이다. 주의 징책을 내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시므로 내가 쇠잔하였나이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심으로 사람을 바로 잡으실 때 그의 아름다움은 좀과 같이 소멸케 하시나니 진실로 모든 사람이 헛되나이다.”(시 39:7-11)
그렇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조만간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을 바라보면서 그때에 정결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올지라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결케 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책의 손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온 힘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 고백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 주의 손인 사람들과 이생에서 자기들의 몫을 받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나의 혼을 구하소서. 주께서 주의 감추어진 보화로 그들의 배를 채우셨으니 그들은 자녀들로 가득하고 그들의 남은 재산을 자기들의 아기들에게 남겨주나이다. 나, 나는 의 가운데 주의 얼굴을 보리니 내가 깨면 주의 모습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그렇습니다! 그는 오랜 후에 부활하게 되는 날을 바라보면서 그때에 그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의 가운데 부활하는 소망을 굳게 붙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성령을 통하여 앞으로 그의 혼을 구원하실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나타나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세상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셋째 날에 살아나실 것을 미리 알았던 것입니다. 사도 마태는 다윗 왕을 포함하여 많은 구약 서도들이 부활하는 광경을 보고 증거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신 후 숨을 거두시더라. 그런데,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들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잠들었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일어났으며 주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더라. 백부장과 그와 함께 예수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마 27:50-54)
다윗 왕이 바라보던 소망을 함께 바라보면서 모든 고난을 견디며 자신을 부인하면서 살았던 사도 요한은 앞으로 주님을 만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니, 이는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지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이 정결하신 것처럼 자신을 정결케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또한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그분이 우리의 죄들을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그분 안에 거하는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그를 보지 못하였으며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 3:1-6)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정결케 되어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깨끗한 세마포를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증거했습니다:
“이는 그가 교회를 말씀에 의한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시고 깨끗게 하사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나타내서 점이나 주름진 것이나 또한 그러한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려 하심이라…….악은 어떤 형태이든지 피하라. 화평의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분은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것을 행하시리라.(엡 5:26-27, 살전 5:22-24)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세상에 머물고 있는 동안 그들을 온전히 정결케 하시려고 때로는 징계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심으로써 온 영과 혼과 몸을 그분 앞에 정결한 신부로 준비시키시기 위하여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