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람이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욥 11:12). 뿐만 아니라, 사람이 존귀에 처해 있어도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들과 같도다(시 49:2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 많이 쓰는 말들 가운데 “ass”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당나귀라는 말인데,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본문 말씀가운데 욥이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의 친구 중 하나가 욥을 향하여 욥이 위선자이며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던 말 가운데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나는 사람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들나귀 새끼는 집에서 키우는 가축 가운데 당나귀와 같은 혈통의 짐승입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배운 우화 가운데 “꾀 많은 당나귀”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당나귀의 등에 무거운 소금을 잔뜩 싣고 개천을 건너던 중 발을 잘못 디디어 그만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물에서 일어났을 때 소금이 물에 다 녹아버리게 되어 짐이 아주 가볍게 된 것입니다. 다음 날 이 당나귀는 솜을 잔뜩 싣고 가게 됩니다. 이상하리만큼 짐이 가벼웠습니다. 그럼에도 이 미련한 당나귀는 또 한 번 물에 넘어지면 더 가벼워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솜이 물에 완전히 스며들어 너무 무거워 움직일 수도 없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성경은 당나귀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 시키신 후에 모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당나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태를 여는 모든 것과 네가 소유하고 있는 짐승에게서 나온 첫배 새끼를 주께
따로 떼어놓을지니 그 수컷들은 주의 것이니라. 나귀의 모든 첫배 새끼는 네가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것을 대속하지 않으려면 너는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또 너의 자손 가운데서 모든 첫태생을 대속할지니라.”(출 13:12-13)
다시 말해서 나귀의 첫태생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 나귀를 살리기 위해서 어린양을 대신 죽여야 할 것이며 어린 양으로 대속하지 않으려면 목을 꺾어 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침례 받으시려고 요단 강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본 침례인 요한은 유대인들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어린양이로다.”(요 1:29)라고 소리쳤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어 그 어린양의 피로 대속 받지 않으면 마치 목이 꺾여서 죽는 나귀처럼 멸망을 받게 될 것이며, 그분을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입니다.
선지자 스카랴는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그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하라. 오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지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오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지니셨고, 겸손하시며 나귀를 타시리니 나귀의 새끼인 어린 나귀니라.”(슼 9:9)
선지자 스카랴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유대 땅에 나타나신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난 모든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한 마리 어린양이 되셔서 모든 들나귀 새끼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러면 곧 나귀 한 마리가 그 새끼와 함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서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거든 ‘주께서 그것들을 쓰신다.’고 말하라. 그러면 그 사람이 즉시 보내리라.’ 하시더라.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마 21:2-3)
이 때에 그들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나귀들 위에 자기들의 옷을 얹고 그 위에 주님을 태웠습니다. 또한 아주 큰 무리가 자기들의 옷을 길에 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그 무리가 앞서 가고 뒤따르며 소리질러 말하기를 ‘다윗의 아들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이 있도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했습니다(마 21:6-9)
그때만 해도 그들은 자신들이 들나귀 새끼처럼 태어난 것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를 대속하시지 않으면 나귀들처럼 목이 영원히 꺾여 멸망하며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살고 있는 칠십억이 넘는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이 들나귀 새끼처럼 태어나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들의 모든 죄들이 대속함을 받지 않으면 그들의 목이 꺾여 영원한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슬피 우셨던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들나귀 새끼같이 태어난 죄인들을 위한 대속 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셨지만 그분께서 자신을 통하여 대속을 받기 원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때에는 더 이상 나귀새끼를 타지 않으시고 하늘에 있는 휜 말을 타시고 오실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장면을 성령 안에서 미리 본 사도 요한이 본 것을 증거했습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흰 말이 보이더라. 그 의에 앉으신 분은 신실과 진실이라 불리며 의로 심판하고 싸우시더라. 그 눈은 불꽃 같고 머리에는 많은 왕관이 있고 또 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르더라. 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계 19:11-13)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자신들이 들나귀 새끼들처럼 태어난 죄인들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린양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대속 받지 않으면 영원무궁토록 그들의 목이 꺾여 영원한 불 못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지각 없는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라. 그것들의 입은 재갈이나 굴레로 꼭 물려져야 하리니 그렇지 않으면 그것들이 네게 가까이 올까 함이라.”(시 32:9)
지각 없는 말은 전쟁터에서 화살이나 총알이 빗발처럼 그들에게 날라올 때에도 미련하여 앞으로 돌진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련하고 고집 센 노새들도 지각 없는 말처럼 행동하다가 죽는 것을 봅니다. 여전히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섞여 살면서 지각 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사망의 덫을 보지 못하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으로 대속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그들의 지각을 열어주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록 들나귀 새끼처럼 태어났으나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구속 곧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들도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꾀 많은 당나귀처럼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십자가가 너무 무겁게 여겨져서 스스로 벗어버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은 몸이 가벼워져서 편해진 것처럼 생각되지만 솜을 잔뜩 지고 가던 당나귀가 가벼운 짐을 벗어버리려고 일부러 물에 넘어졌을 때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스스로 벗어버리면 잠시 동안은 편할 수는 있어도 조만간 더 무거운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까지도 자신을 사랑하며 자신의 유익을 먼저 구하면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 살다가 결국 더 큰 고통 속에 살게 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