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을 믿는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극심하게 박해하던 한 사람을 만나주셔서 말씀하셨을 때 그 날 이후로 거듭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한 사도 바울의 삶의 목표에 대한 간증을 본문 말씀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누가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가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려 그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시더라.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가시채를 걷어차는 것이 네게 고통이라.’고 하시더라. 그가 떨며 놀라서 말하기를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행 9: 3-6)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였습니다. 그가 그때까지 자기 나름대로 살아온 삶이 완전히 잘못된 삶이었음을 순간적으로 깨닫고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자신이 알고 있던 주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주여“라고 고백한 한 마디 말 속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은 그분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을 지키기만 하면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겨지는 줄 굳게 믿고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보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만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하면서 이 소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그의 눈에 가시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어떤 종교를 통하여 또는 자신의 양심을 통하여 수양하면서 자신의 의를 쌓아가는 사람들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나 윤리들을 철저히 지켜 자신이 의를 쌓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쓰레기 통의 겉을 닦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가 몰랐던 것입니다. 쓰레기 통 같은 육신을 평생 동안 열심히 닦아도 사람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쓰레기 같은 죄들을 닦아낼 수 없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양심 속에 있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는 것을 그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마다 엄청난 분노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안에 분노라는 죄악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율법은 사람들이 지킬 수 없는 것이기에 율법을 통하여 사람들 안에 있는 죄악들을 깨닫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자신이 만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목적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주여,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 그가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손실로 여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삶을 살고자 할 때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많은 계시들을 주셨고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들을 기록하게 하셔서 신약 성경 속에 열네 편의 책을 우리 모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의롭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다고 증거했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거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어 성령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그 순간 받게 되는 은혜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누구나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만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내가 너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요 11:25,26, 40)
이 말씀을 하신 후 나사로가 죽어 나흘 동안 있는 무덤을 향하여 예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 순간 죽었던 나사로가 손발이 수의로 동여지고 얼굴이 수건으로 가려진 채 나왔습니다. 그분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만물들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실 때 즉시 빛이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르시는 날에 모두가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기 전에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추어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일으켜지며 또 어떤 몸으로 오는가?’라고 하니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린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리라.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앞으로 될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밀이나 다른 씨앗의 알맹이일 뿐이나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씨앗에다 형체를 주시되 씨앗마다 그 고유한 형체를 주시느니라. 모든 육체가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어떤 것은 사람의 육체요, 어떤 것은 짐승의 육체며, 어떤 것은 물고기의 육체요, 또 어떤 것은 새의 육체라. 또한 하늘에 속한 몸들도 있고 땅에 속한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영광이 다르고 땅에 속한 영광이 다르니라.”(고전 15:35-40)
사도 바울은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이심을 전하심으로 인해 극심한 고난을 받으시다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분이 받으신 고난과 죽으심을 함께 받으면서 그분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분께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것처럼 언젠가 그도 부활하는 소망 가운데 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 가운데 그의 삶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면서 그분과 함께 받은 고난에 대하여 주시는 고귀한 상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길을 다 달리면서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세월은 영원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손 너비 같은 시간 동안 부활의 날에 사도 바울이 바라보았던 영원히 고귀한 상을 바라보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때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영화롭게 변화하여 부활하는 날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살전 4:16-19, 고전 15:51-55)
사도 바울은 이 소망에 대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므로 우리가 그곳으로부터 오실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가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그 능력의 역사로 인하여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같이 변모시키시리라.”(빌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