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다니엘서를 공부할수 있도록 또 은혜 베풀어 주 신 것을 감사합니다. 다니엘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하는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앞으로, 될 일을 더 확실하게 깨닫게 하시고, 다니엘에게 주셨던 그러한 지혜와 명철을 우리에게도 주셔서 이 말씀을 깨닫고, 앞에 일을 잘 알아서, 소망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이 바빌론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시고, 또 이 말씀을 이 사이트를 통해 듣는 모든 청취자들에게 동일한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청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다니엘서를 시작하겠는데, 우선 먼저 다니엘서를 시작하기전에 여러 가지 서론적인 부분을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니엘서는 전체가 12장으로 되어있죠. 절수가 357절 정도 되겠습니 다. 히브리어로 “단” 이렇게 이야기 할때는 심판주란 뜻입니다. 그리고 “다니”는 나의 하나님 또는 나의 심판주 이런 뜻이지요, 또 “엘”이란 엘로힘의 약자로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라는 이름은 곧 하나님은 나의 심판주, 또는 나의 심판주는 하나님이시라 라는 뜻이 됩니다. 신약이 끝나는 시점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걸쳐 일어나는 앞으로 될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 책이 요한 계시록이라면 구약이 끝나는 시점에서 신약이 시작되는 시점까지 그 역사 기간 동안에 일어나게 될 앞으로 일들을 기술하고 있는 이 책이 다니엘서죠. 이런 점에서 볼때 다니엘서는 성경 안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계시록과 다니엘서가 같은 공통점이 바로 이 두 책이 모두 어떤 공백기를 메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 문에 말라기에서 마태복음까지에 모든 역사적인 정보를 입수하려면 이 기간의 공백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다니엘서를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다니엘서에는 구약이 끝나는 말라기에서 신약이 시작되는 마태복음 사이의 공백기를 매우는 역사적 사실 뿐만아니라, 교회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대 환란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재림하는 일까지도 이미 내다보는, 예언적인 말 씀들이 담겨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다니엘서를 읽으면서 우리의 시야를 과거 역사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미래까지도 폭 넓게 볼수 있어야 하죠.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에 담겨있는 예언들을 정확히 이해 하는데 아주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가 다니엘 서를 공부해야합니다. 말라기에서 마태복음까지에 이르는 이 기간의 역사적인 정보를 어떤 역사적인 분야에 해석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비문들에 기록된 내용들이나 유적 들의 흔적같은 유력한 역사적인 자료가 있긴 하지만, 그것이 결코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설명은 될 수 없습니다. 참고는 될 수 있겠죠. 말라기에서 마태복음에 걸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은 역시 다니엘서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끝에서 그리스도 재림에 이르기까 지 걸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이 기간에 역사를 기술하고있는 교회사라는 것이 있긴 있죠.
그런 데 이 기간에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가 교회사 보다도 어디까지나 요한계시록 특별히 1,2,3장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온전히 의지할수 있는 것은 하나 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이 교회시대라는 공백기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다니엘서는 말라기에서 신약의 시작에 이르는 공백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고, 성경 이외의 어떤 역사적 자료나 기록들, 그리고 교회사 같은 기록들이 귀중한 자료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 뿐이며, 모든 설명의 원천이 될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모든 정보의 원천은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주님이 오시기전 607년 BC607년에서 534년 사이 약 73년 간에 걸친 그러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 책에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의 시간적 범위들을 우리가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다니엘이 바빌론의 느부캇네살왕에게 포로로 사로잡혀가있는 동안의 일들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죠. 다니엘서는 원래 히브리 성경 가운데서 선지서들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와 별도로 케루빔이란 성문서들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다니엘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생애 대부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또 그가 유달리 이방인들에 관해서 주로 이야기 하고 있고, 유 대인들로서는 그러한 다니엘이 선지자의 반열에 끼는 것은 조금 안좋게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 습니다. 이 책의 일부는 아람어(시리아의 고대언어)로 기록되었고, 구약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알듯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지만, 창세기 일부와 다니엘서 일부가 아람어로 기록되있다는 것 을 알수 있고, 특별히 다니엘서는 2장 4절부터 7장8절까지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미래에 관한 예언의 부분에 해당되는 그런 부분 부터는 히브리 말로 기록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 겔과 다니엘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예언을 한 예언서이고, 이사야와 예레미야에서는 잡혀가기 전에 그 심판을 예언한 예언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1장 일부분을 우리 가 상고하겠습니다.
1절, 2절 보겠습니다. [유다의 여호야킴 치리 제 삼년에 바빌론의 느부캇네살왕이 예루살렘에 와서 그 성을 포위하였더라. 주께서 유다의 여호야킴 왕을 하나님의 집 기명 일부와 더불어 그의 손에 주셨더니, 그가 그것을 시날땅 자기 신의 집으로 가져와, 그 기 명들을 그의 신의 보물창고로 옮겼더라.] 우리가 에스겔서에서 배웠죠. 이집트의 느코왕이 남 왕국 유다를 침공해서 유다왕 여호아하스를 폐위시켰죠. 그리고 그 형제 엘리아킴을 유다왕으 로 옹립한적이 있습니다. 이 엘리아킴이 바로 오늘 나오는 여호야킴 왕입니다. 이집트의 느코 왕이 엘리아킴을 옹립한 이후에 그 이름을 여호야킴으로 바꿔줬던 거죠. 이게 역대하 36장 3 절 4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야킴은 이집트 세력을 등에 업은 허수아비 왕 이었죠. 성경은 이 여호야킴 왕 역시 그의 조상들이 행한대로,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 이 렇게 열왕기하 23장 37절과 역대하 36장 5절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왕은 이집트에 보낼 조공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 땅의 백성 각자에게 메긴 세금에 따라서 은과 금을 억지로 걷어들인 왕이었다고, 열왕기하 23장 35절에 나옵니다. 특별히 열왕기하 23장에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하게된 이유가 히스기야 왕의 아들 므낫세가 행한 모든 죄들 때문이다. 이렇게 열왕기하 24장 3절에 되있죠. 이 므낫세는 히스기야왕을 이은 왕으로 여호야킴의 증조부가 되 는 인물이었고, 그 선왕인 히스기야와 달리, 하나님께 심히 가증스럽고 악한 범죄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자행했습니다. 50년동안 통치하면서 많은 선지자들을 죽였죠. 그런데 그가 마지막으 로 회개했기 때문에, 그 당 대에는 심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들이 자행한 그 악한 범죄를 응징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유다를 넘겨주셨죠.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왕에 의해서 여호야킴이 왕위에 올라서 치리하기 시작한지 3년만에 유다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공한 것은, 비단 이번 한번만으로 끝나는게 아니죠. 여호야킴이 차꼬에 묶인 채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겨 우 8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에도, 석 달정도 지나기 무섭게 느부갓네살이 다시 침공해 와 서 여호야긴 왕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죠. 이게 우리가 배운 에스겔서와 예레미아에서도 나 오죠. 여호야긴의 뒤를 이은 시드기야. 그 마지막 왕도 9년만에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고 3년 동안 버티다가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바벨론으로 잡혀갔죠.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모반하고 이집트쪽으로 의지하게 되기 때문에 이렇게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게 되었고, 그 당시 제사 장들이 예루살렘은 가마솥 같고 백성들은 고기 같다. 아무도 우리를 가마솥에서 꺼내갈 수 없다. 이렇게 거짓 예언을 했죠. 다 속았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가마솥 안의 고기들을 일부 만 남겨두고 다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것이 나옵니다. 이렇게 다니엘도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 으로 사로잡혀 간 때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을 때였고, 이 때 다니엘은 다른 3명의 히브리 청년들과 함께 붙잡혀 갔고, 이들은 느부갓네살의 명령에 따라 바벨론 왕궁에서 바벨론의 학문과 언어를 익히게 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니엘 1장은 먼저 유다 왕국이 처했던 아주 피폐한 시대 상황부터 말씀하기 시작하는데, 1절에서 바벨론 느부갓 네살 왕의 침공 사실을 언급하고 2절에서 느부갓네살이 유다에 처들어와서 자행한 일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느부갓네살은 유다왕 여호야긴을 생포해서, 포박하고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의 집 기명들을 마구 노략했죠. 그가 노략한 기명들이 어떤 것인지는 상세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전의 기명들 가운데 금촛대와 진설병을 차려놓은 상, 이런 것들과 향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약궤는 그들이 가져가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때, 사도 요한이 성령 안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며 성전 안에 있는 그의 언약궤를 분명히 보았다고 계시록 11장 19절에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언약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셋 째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가 없죠. 성경에 있으니까 분명히 언약궤는 하나인데 언약궤가 하늘에 있다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도 언약궤에 손을 못댄 것은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이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영화를 만들어서 언약궤를 찾았는데, 문을 열어보니 살인 광선이 나와 사람들을 죽이는 영화도 있었죠. 어떤 고고 학자는 언약궤가 있는 곳을 찾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경말씀만이 진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성전에 기명들을 다 뺏어갔다는 사실은 역대기하 36장7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재화들도 아닌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 기물들이 이방 나라에 노략당해서, 그것도 다른 곳이 아닌 이방신을 섬기는 더러운 신전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 으로서는 치욕중에서 큰 치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은 치욕을 받고있습니다.
1장3절부터 보겠습니다. [왕이 그의 내시 장관 아스페나스에게 이스 라엘 자손들과 왕의 씨들과 고관들 중에서 몇사람을 데려오라고 일렀더니, 곧 흠없고 잘생겼으며 모든 지혜에 능숙하고, 지식에 뛰어나며 과학을 이해하며, 그들안의 왕궁에서 설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춘 그런 소년들로서, 그들에게 칼테아 인들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기 위함이더 라. 또 왕이 그들에게 왕의 음식과 왕이 마시는 포도주를 매일 일정량 지정하였으니, 3년간 그 들을 길러, 마지막에 그들로 왕앞에 서게 하려 함이었더라.]
3절에서 보면 왕의 씨들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절에 나오는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유다의 히스기야왕 이 후의 어떤 이들이 바로 유다왕 히스기야왕 이후에 어떤 왕들의 손자들과 증손자들 중 하나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이사야서 39장 7 절에 보면 [또 네게서 나올, 즉 네가 낳을 네 아들중 몇을 그들이 잡아가서 바빌론 왕궁의 내시들이 되게 하리라 하더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결국은 이 말씀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있고,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다니엘과 세 청년들이 내시가 되었는지는 알 수없지만, 이사야서를 볼 때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다니엘과 히브리 세 청년들이 왕의 씨들이다. 왕족이란 것을 알 수 있고, 그 용모가 준수하고 고급 교육을 받아 지 혜가 있고 지식이 풍부했으며 과학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빌론 왕이 특별히 왕족들을 자기 나라에 데려와 3년동안 교육시켜서 또 써먹으려고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서 유다 왕족의 뿌리를 뽑아내고 유대 인으로써의 정신적 잔재를 다 씻어내어 이들을 바빌론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일꾼들로 재 교육 하여 양성하려고 한 것을 본문을 통해 알 수 있고,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왕은 이러한 인재들을 바빌론 식으로 다시 교육시켜서 바빌론 왕국을 위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들로서 양성하고자 욕심을 낼 만큼 폭이 넓고 현명한 통치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바빌론 왕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셨 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왕궁에서 갈테아 인들의 학문과 언어를 가르치도록 조치를 취했 죠. 이 책임을 왕의 내시장관 아스페나스에게 맡겼고, 내시장관은 또 이들을 멜살이라는 사람 에게 감독하도록 맡겼다고 11절 보면 나오고 있습니다. 사실 내시라는 것은 자식을 낳을수 없는 남자를 말하죠. 동양나라의 군주들처럼 꼭 왕궁에서 자신들 곁에 붙어있으면서, 갖가지 심 부름과 연락하는 업무 또 조언하는 것들을 하는 신하들로써, 고자들중에서 선별해 쓰지 않는 왕이 없었죠. 한국도 마찮가지죠. 느부갓네살 왕은 이들 유대청년들도 그런 내시로 삼아 쓰려 고 했던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여기서 느부갓네살이 노렸던 것, 즉 이스라엘의 지혜있는 모 든 사람들로부터 노렸던 것은 그들 속에 잠재해 있던 모든 유대인의 뿌리를 말끔히 뽑아내버 리고, 바벨론의 학문적 지식과 언어를 그들에게 주입함으로써, 그 자질을 바벨론 식으로 완전히 바꾸려는 그러한 세뇌교육을 하려고 계획한거죠. 특별히, 이들이 내시가 되었다는 것은 요한계시록 14장에 언급되는 동정들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 안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가 대 환란 기간에 땅에서 구속받은 유대인 14만 4천명이 시온산 위 에 서 계신 어린 양과 함께 있는 것을 보는데, 그때 그들을 향해서,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아니한 자들이니, 이는 그들이 동정들임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 리스도 께서도, 모태로부터 고자로 태어난 자도 있고, 사람에 의해 고자된 자도 있으며, 또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이 대환란 때, 등장하는 적 그리스도의 예표인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보았고, 대 환란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의 온갖 박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14만 4천명이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채 끝까지 견뎌내고,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아서 대환란 기간 끝 무렵 휴거되는것도 우리가 잘 알고, 이미 배웠습니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은 자들이다, 이것은 대환란 기 간의 예배에는 음행이 예배 의식의 일부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죠. 끝까지 그들이 견뎌냈다. 음행을 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냈다. 그리고 내시가 된 다니엘은 이들의 모형인 것을 우리가 여 기서 알수가 있습니다. 4절에 보니까 이들은 또 모든 지혜에 능숙하고, 지식이 뛰어나며, 과학 을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기원전 600여년 전에 벌써 과학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실 그보다 더 이른 시대에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중남미의 고대 인디안들, 잉카라던가 마야라던가 이런 문명을 우리가 볼 때에 그들이 고대 과학 기술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어요. 고대 이집트도 마찬가지죠. 현대 과학 전문 잡지들이 고대 문명의 흔적들과 잔재들을 소개하면서 정말 미이라 같은 것이 아직도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볼 때, 그때 과학 기술이 얼마나 발전 됐다는 것을. 특별히 노아시대를 볼때는 사람이 수백년이나 살았는데, 지금은 수십년밖에 안 살아도 어떤 전문 분야가 되면 엄청난 기술을 개발하죠. 컴퓨터만 해도 수십 년 전엔 별거 아니었지만 지금은 엄청나게 발전했습니다. 불과 수십 년 만에 이렇게 발전했는데, 전문가가 수백년 동안을 어떤 일을 한다면 얼마나 큰 발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노아시대는 모든 것이 물과 함께 사라졌고, 소돔과 고모라 때도 또 다 사라졌고, 잉카나 마야 문명도 수천년 있었지 만. 어느날 갑자기 다 땅속으로 매몰되어 버리고, 문명과 함께 매몰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지 그들의 문명이 지금보다도 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겠죠.
6절부터 보면 [그때 이러한 자들 가운데, 유다 자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더라. 내시장 관이 그들에게이름을 주었으니, 그가 다니엘에게는 벨트사살이라는 이름을 하나냐에게는 사드 락이라는 이름을 미사엘에게는 메삭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아사랴에게는 아벳느고라는 이름을 주었더라. 그러나 다니엘은 그가 왕의 음식으로나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마음의 결심을 하고, 내시 장관에게 요청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하였더라.] 다니엘과 하나냐 미사엘과 아사랴에게서 유대인의 뿌리를 제거하고 바벨론의 쓸모 있는 일꾼으로 바꿔놓기 위한 첫 번째 조치로 그들에게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다니엘에게는 벨트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러한 이름들을 주었죠. 사실 뭐 이름을 바꾸는 거야 별 문제가 없겠죠. 그렇게 불리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벨론 왕은 내시 장관을 통해서 이름만 바꾼 것이 아니라 결국 바벨론의 음식, 왕의 음식을 먹게 했는데, 틀림없이 이 세 사람은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써 간증을 보여 주기를 원했던 거죠. 사람이 열흘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면 금방 안색에 표가 나죠. 그러나 다니엘은 먹는 것으로 인해서 몸이 수척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흘동안 시험 기간을 가져보도록 내시장관에게 건의하죠. 내시장관이 염려하는데도, 아닌게 아니라 몸이 허약해지고, 얼굴이 수척해지고 하면 그때는 내시장관이 죽을 수 있죠. 다니엘이 콩죽만 먹고 물만 마시고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은, 자신의 체질이나 콩죽과 물의 영양학적 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는 고난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고난중에도 보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대로 신뢰했기 때문이란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사람은 매사에 자신 있는 법이죠. 하나님을 신뢰할 때 죽을 것 같지만 절대로 죽지 않죠. 온전히 믿 어야 하죠. 이게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세상과 더럽히지 않겠다는 이것. 바로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것. 내가 손해가 나도 하나님의 왕국과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 이 사람이 굶어 죽을거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14절부터 보면 [그러므로 그가 그일에 대해 그들에게 동의하고, 그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였더 니, 열흘이 끝났을 때, 그들의 용모가 왕의 음식을 먹은 모든 소년들보다 더욱아름답고 더 살지게 보였더라. 그러므로 멜살이 그들의 음식과 그들이 마셔야 하는 포도주를 가져가고, 그들 에게 콩죽을 주니라.]
열흘 동안 콩죽과 물만 먹고 마시게 한 결과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 보다도, 더 용모가 곱고 살찌게 보였단 이야기죠. 그래서 이들은 마침내 본격적으로 콩죽 위주로 채식 생활을 시작하게 되지요. 채식이 육식보다도 건강에 좋고 나쁘다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은 채식이 육식보다 건강에 좋다 중요하다 하지만, 가령 지금 사람들이 고기 먹지 않고 살 수 있나요. 고기를 먹어야만 우리가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채식만 해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사례도 여러 가지 있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믿음으로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꼭 채식만 하라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되겠죠. 8절에 보니까 [그러나 다니엘은 그가 왕의 음식으로나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마음에 결심하고] 그러니까 이름 바뀐건 별로 문제되지 않는데, 결국 유대인으로써 음식이 뭐가 대수로울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고린도전서 8장에 보면 이방인의 우상에 드린 그런 제물을 알고 먹으면 안된다. 모를 땐 괜찮다. 우상에 바쳐진 재물은 먹지 말라. 이렇게 이야기 했죠. 묻지 말고 먹어라 이야기했죠. 다니엘은 왕궁에서 준 음식은 우상으로 더럽혀졌다는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죠.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도 사도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시는거죠. 율법 하에 있던 다니엘에게 는 문제가 심각했죠. 그러므로 그는 왕의 음식으로나 왕이 마시는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리라고 마음의 결심했던 거죠. 분명히 방금 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왕의 음식과 왕의 포도 주는 우상 신에게 바쳐지는 것이 명백한거죠. 이건 앞서 2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에서 다 노획해온 하나님의 성전 기명들과 보화들을 자기 신의 집으로 가져가 그의 신의 보물 창고로 옮겼죠.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우상숭배자였습니다. 이방인들은 대부분 우상신들을 섬기는 게 통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면 자신의 음식과 음료도 먼저 우상신에게 재물로 바친 후 먹고 마실것이고, 그중 일부를 다니엘과 나머지 유대인 청년들에게 내려질 것이 틀림없는 것을 우리가 알고, 그것을 다니엘이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그냥 받아 먹는다면, 내시 장관이나 다른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그렇게 생각했을것이다 하는 것을 다니엘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들을 먹는 구나 이렇게 속으로 놀릴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내시장관에게 말했죠. 나는 우상에게 바쳐진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나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소. 다니엘은 유대인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우상신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곧 자신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9절부터 보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다니엘로 내시장관의 호의와 은총을 얻게 하였더니, 내시 장관이 다니엘에게 말하기를 내가 내 주 왕을 두려워 하노라. 그가 너희의 음식과 너희의 음료를 정해 놓으셨으니, 너희의 얼굴이 너희와 같은 또래의 소년들보다 1 못한 것을 그가 어찌 보셔야 하겠느냐. 그렇게 되면 너희가 왕 앞에서 내 머리를 위태롭게 만들 것이니라. 하더라. 그러자 다니엘은 내시 장관이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려고 세운 멜살에게 말하기를, 내가 당신께 간구하노니 열흘동안 당신의 종들을 시험하시어, 우리에게 콩죽을 주어먹게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하신후, 당신 앞에서 우리의 용모와 왕의 음식을 먹은 소년들의 용모를 살펴보시어, 당신이 보시는 대로 당신의 종들을 처분하소서, 하니라.]
왕의 음식을 받아먹기를 거절한 다니엘에게 내시 장관의 반응이 호소에 가깝죠. 자기가 죽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걸 먹어라 하죠. 그러나 다니엘은 멜살에게 한가지 제안을 하죠. 콩죽 만 먹여도 우리가 괜찮을것이니 염려말고 열흘동안 시험하라 말하죠. 이렇게 콩죽을 먹었는데 보니까 한사람도 초췌한 사람이 없고, 결국은 그렇게 됐다는 것을 나중에 보면 알 수가 있죠. 자, 이렇게 다니엘서 구절 가운데서 우리가 보면 이 세 청년들이 하나님께 순종을 했고, 이들이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정말 이땅에 살면서 세상에 더럽혀져선 안되죠. 깨끗해야 되죠.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함을 유지하다가 주님을 만나야 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 육신까지도 주님이 건강하게 해주시고, 제대로 진미 음식을 먹지 못할지라도, 정말 믿음으로 살게 되면, 주님이 주신 것으로 먹 고 살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강건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 다. 세상에 어떤 영양학적인 것을 떠나 그 이상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보호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첫 시간 다니엘서를 통하여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도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 에 물들지 않고, 끝까지 영적인 정절을 지키고 세상 이방신에게 우리가 화합하지 않고, 세상을 섬기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떠나 멀리 하여 주님 앞에 구별되고 거룩한 삶을 살다가, 주님을 다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될수 있도록 주 님 도와 주시옵시고,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주셨던 그 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 사, 그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아버지 하나님, 시험에 들지 않고 끝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정절을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시고, 이 교 회는 정절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신부들만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고, 누구든지 들어와 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교회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주 예수그리스도의 이 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